지난 주말, 운동화를 세탁하러 동네 셀프빨래방에 갔습니다. 운동화 세탁 시간이 약 50분 정도 걸리니 최근 읽고 있는 책 <경험의 멸종>도 같이 챙겨갔어요. <경험의 멸종>은 사람들이 점점 더 기술에 의존하게 되면서 직접적인 경험을 잃어가는 현상을 꼬집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손 글씨'가 사라지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였는데요.
'손 글씨가 사라지면 잃는 것이 있다. 측정 가능한 인지 능력을 잃게 되고, 수천 년간 손과 필기구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던 즐거움도 잃게 된다. 우리는 잉크와 종이가 주는 감각적인 경험, 손 글씨가 주는 시각적 즐거움을 잃게 된다. 우리는 죽은 사람의 글을 읽는 능력을 잃게 된다.' - 크리스틴 로젠, <경험의 멸종> 중에서
이제 모든 글씨는 타이핑으로 대체할 수 있고, 심지어 원하는 문장을 읽으면 기계가 대신해서 타이핑을 쳐주는 시대입니다. 펜으로 글씨를 쓰는 일은 타이핑 속도에 비해 현저히 느릴 뿐만 아니라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손으로 글씨를 써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저희 동네 빨래방에는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포스트잇과 펜이 있습니다. 빨래를 기다리는 동안 손님들이 지루하지 않았으면 하는 사장님의 배려겠지요. 손 글씨가 사라진 시대에 누가 이런 걸 쓸까 싶기도 하지만, 신기하게도 빨래방 한쪽 벽에는 빨래방에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이 쓰고 간 메모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습니다.
곧 결혼하면 엄마랑 빨래방에 와서 수다를 떨지 못할 것 같다며 아쉬움을 남긴 새댁의 메모지, 자신의 인생도 빨래처럼 깨끗해졌으면 좋겠다는 누군가의 간절함이 담긴 메모지, 앞으로 잘 살아보자는 다짐을 남긴 신혼부부의 메모지, 수능을 앞둔 수능생의 합격기원이 담긴 메모지까지. 마치 오래전 빨래터에서 아낙네들이 각자만의 속사정을 털어놓듯, 각자만의 필기체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만약 이 수많은 메모지가 기계가 쓴 폰트로 쓰였다면 어땠을까요?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삐뚤빼뚤한 글씨체만이 담을 수 있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을 겁니다. 손 글씨의 장점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손 글씨는 계획의 수립이나 과제에 대한 집중력에 있어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발달 초기인 아이의 경우 읽기의 기초가 되는 뇌 영역의 문자 처리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손 글씨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밤마다 원서 필사를 하기 시작한 것도 의도적으로 글씨를 쓸 일을 만들기 위해서였어요. 영어 공부의 목적도 있었지만, 책의 내용을 글씨로 옮겨 적는 수고로움은 지식을 높여주기도 하지만 낮 동안 들끓었던 마음을 차분히 정화시켜 주었습니다.
깨끗해진 운동화를 들고 빨래방을 나오는 길에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습니다. 500원짜리 10개로 누리는 기계의 편리함과 메모지 1장으로 나누는 인간적인 소통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세상. 이것이야말로 기술과 인간이 공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